폭력적 시위 나쁘다?
보장된 권리 찾는 과정
일부 농업단체 관변화
이경해 열사 생각나

1월 28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회화 작품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여성 2명으로부터 수프를 뒤집어쓰는 모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여성들은 프랑스 농업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량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한 행동이었다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의 농업정책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달 중순부터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유럽 내 각국 정부의 농업‧환경 정책 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파리로 향하는 모든 주요 도로를 트랙터로 막겠다고 선언했다. 

1월 30일, 프랑스 농민들이 예고한 대로 파리행 간선도로를 트랙터로 무기한 점거하자, 이번에는 벨기에 농민들이 유럽 무역통로인 제브뤼헤 항구를 봉쇄했다. 독일 베를린에서도 이미 농민들이 동참했다. 

유럽 각국들이 농민 시위에 대해 강경대응하자 유럽 농민들의 시위가 갈수록 거세지면서 2월 26일, EU 농업 장관회의가 열린 벨기에 브뤼셀에 집결한 각국의 농민들은 도심을 점령하고 타이어 등에 불을 지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유럽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각국의 사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농가 고령화,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 대형 유통체인의 헐값 구매, 연료비 상승 등으로 인해 끓어오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 농업용 연료 보조금을 삭감하겠다는 농업 위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공통된 분석이다. 

여기에 EU가 질소비료 사용을 최소 20% 줄이도록 하는 내용의 공동농업정책을 펼치는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기후전환 비용을 온전히 농가에게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으로 인식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뜩이나 유가 급등 등 생산비용이 크게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농업용 연료 보조금을 삭감하기로 했으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2050 탄소중립’의 부담을 떠안게 된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세계화 이후 밀려든 값싼 수입 농산물과의 힘겨운 경쟁, ‘알디’로 대표되는 대형 소매업체의 ‘가격 후려치기’까지 겹치고 겹쳐지자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농민들은 EU 환경규제에 맞추려면 생산비용은 더 늘어날 것이고, 이미 최저임금 수준을 밑돌고 있는 농가소득도 더 낮아질 것이 뻔하다.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에 EU는 이날 다급하게 농민 달래기에 나섰다. 27개국 농업 장관들은 26일 회의에서 “농민들의 행정 부담의 완화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합의했으며, EU 집행위에 더 장기적인 해법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유럽의 농민시위 현장과 작금의 한국의 농촌 현실을 대비해 볼 때, 그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재 우리 농민들이 갖지 못하고 있는 목표 의식에 대한 그들의 강한 결집력이고 단호함이었다. 

지금 유럽의 농민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 농민들의 현실이 다른가? 우리 농민들의 현실은 유럽의 농민들보다 훨씬 나은가? 우리 정부는 유럽의 정부들보다 농민들의 삶에 더 관심이 있는가? 농축산물의 자급률은 높은가? 그래서 수입 농축산물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가? 탄소배출의 책임을 농축산업에 돌리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유럽과 한국의 농민 입장에서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임에도 한국의 농민들은 왜 조용한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많은 농민단체를 비롯 생산자단체들의 성격이 변질됐다.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정부‧국회에 현장에 맞는 정책 수립과 입법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행위 자체를 주저한다. 성명서 한 장 달랑 내고, 국회 앞에서 기자 간담회 정도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앞에서 한 달 가량 단식농성을 하며 그해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5차 각료회의장 정문에서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고 외치며 목숨을 바친 이경해 열사가 떠난지 20년이 지났다. 

지금 이경해 열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결연함을 현재 농업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다. 언제부턴지 농민의 오피니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정부 정책에 무조건적 찬양일색인 데다, 관변단체로 이끌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참으로 아쉽기 때문이다. 

롤링스톤, 뉴욕타임스의 컬럼니스트인 로이 스크랜턴은 “‘폭력과 시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편안함을 안겨주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보장된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폭력과 시위는 필수적이었다면서 1789년 프랑스 귀족정을 타도했던 프랑스 대혁명이나 세계 각국에서 벌어졌던 모든 혁명을 예로 들었다. 폭력의 위협은 시민권 투쟁에 필수적 수단이었다고 덧붙인다.  

우리의 농업은 지금 안전한가? 먹고 살만 한가?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면 권리는 ‘비럭질’로 퇴색된다. 타인이 인정하지 않는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려면 그에 걸맞는 행동이 필수적이다. 

이번 유럽 농민의 시위를 보면서 “무장 저항과 무장 방어는 시민권 운동의 토대”라는 말이 새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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