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육식 사랑
기초체력 키워지자
서구인과 모든 분야서
대등한 경쟁이 가능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K-팝에서부터 드라마, 영화, 의류, 화장품까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웃 중국인들은 여행지에서 “한국인이냐”는 질문을 수시로 받는다고 불평이다. 코로나 발생부터 공중도덕을 별로 지키지 않는 몰상식함 때문에 현지에서 홀대를 받는 것은 물론 출입을 금지시키는 음식점도 늘어나고 있다. 

그와 반대로 한국인들에 대한 높은 관심은 호의로 이어져 길을 걷다 수시로 “같이 사진을 찍어 줄 수 없느냐”는 즐거운 부탁도 받곤 한다. 한류에 대한 관심은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높은 공중도덕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첫 방문에서 놀라는 것은 모든 공중시설에서의 깨끗함이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정직성이고, 밤에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 수 있는 안전성이다. 이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것이 신기하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신기할 것도 없지만 한 번이라도 외국에서 체류해 본 적이 있는 이는 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놀라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감탄하는지.

특별한 나라 한국과 그 특별한 나라에서 사는 한국인이, 외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자 홀대받는 중국인들이 한국인 행세를 하곤 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에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탈’은 아시아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현지에서 많은 물의를 빚었다. 

그러자 아시아인 중에서 한국인을 구별하는 법이 인터넷상에서 떠돌았다. 먼저 한국인은 아시아인 중에서 키가 크다. 피부가 하얗다(하얗다기 보다 빛이 난다). 좋은 냄새가 난다.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공중도덕을 잘 지킨다는 것이다. 

1889년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에는 ‘인종 전시장’이 있었다. 아프리카 식민지인을 전시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시대 서양 국가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이러한 전시 이면에는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 하고 진화의 정도에 따라 인종을 분류하던 세계관이 있다. 더 진화된 백인들은 덜 진화된 식민지 유색인종을 전시하고 관찰했다. 그 논리 속에서 미개한 이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한 식민 지배가 정당화됐다. 

일본 제국주의도 같은 아시아인을 식민통치 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의 각 인종이 고유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왜 아시아인들을 하나로 묶어 일본인들이 통치해야 하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1903년 일본 오사카에서 대규모 박람회가 열렸다. 이 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는 대만 원주민 2명, 아이누인 7명, 터키인 1명, 그리고 조선인 2명을 포함 총 28명의 살아있는 사람이 전시됐다. 

조선인들의 열등성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인 해부학자 구보 다케시는 한일 강제병합 전 1907년 대한의원 교수로 조선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체질인류학적 관찰을 통해 조선인이 열등한 하등민족이기에 개량이 필요하다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폈다. 권력자인 양반들로부터 모든 것을 수탈당하던 백성에게 삶이란 그저 비루함이었을 뿐이다. 정상적인 한 끼 식사는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의 한국인들은 어떤가? 유럽인들도 놀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다. 모든 스포츠에서 유럽인들과 경쟁할 때면 ‘헝그리 정신’을 강요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지구력에서 체력에서 모두 달리니 정신력만이라도 이겨야 한다는 각오였다. 

체력이 달리니 학문 성취에도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때쯤 ‘체력이 국력’이란 말이 나왔다. 어떠한 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등바둥거리며 기초체력을 기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우리는 세계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경제력에서도 그렇고 스포츠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길러진 체력에,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결집력이 합쳐지자 말 그대로 폭발했다. 이러한 체질 변화는 바로 육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매일 받아드는 밥상 위에는 고기 반찬이 따른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볶아 먹든 취향에 따라 다를 뿐이다. 

지난 2일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 1인당 육류 소비량 추정치는 60.6kg으로, 주식으로 삼아왔던 쌀 59.8kg보다 많았다. 2022년 육류가 쌀을 초과한 후 2년 연속 우위를 보인 것이다. 그만큼 국민들의 육식에 대한 사랑이 높다는 말이다. 

채식주의자들이 아무리 육식에 대해 모함(?)해도 육식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렇다고 육식 섭취가 계속 증가한다는 보장은 없다. 국민소득 4만 달러 이상이 되면 육식에 대한 소비가 정체 내지는 줄어든다는 것이 정설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자급률 하락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국내산이냐 외국산이냐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은 국내산 육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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